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부친의 개화사상으로 근대적 사고 키우며 성장

 
안중근 의사
(安重根, 1879. 9. 2~
1910. 3. 26)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입니다.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으며, 고려 말 대유학자 안향의 자손입니다.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 석 지기의 대지주였습니다. 의사의 부친은 진사였지만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기때문인지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1884년 박영효 등 개화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에 선발되었지만, 그 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습니다.

* 여기서 잠깐! 향반이란?
 
조선후기 향촌에 근거를 두고 향촌 질서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양반 세력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지방 향촌에는 중앙에서 파견되어 다스리는 수령 이외에 향약이나 향규 등의 자치규약을 바탕으로 향촌의 여론을 형성하고 질서를 잡아가는 양반 세력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향촌의 향교나 서원을 통해 자신들의 역량을 과시하면서 지역 여론의 주재자로서 활동하였습니다.

* 갑신정변 :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의사의 집안은 갑신정변 직후 해주를 떠나 신천군의 청계동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청계동에서 성장하면서 8세 때부터 조부의 훈도로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습니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 중심에 우뚝 설수 있는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 청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여순감옥 수간 중 면회 사진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명 ‘토마스(도마)’ 부여 받아

안중근 의사의 부친은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습니다. 안중근 의사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때 안중근 의사의 부친은 동학군이 해주감영에서 빼앗은 5백석 가량의 양곡을 회수하여 군량으로 사용하였는데, 훗날 양곡 반환이 문제가 되었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의사의 부친은 인근 천주교당으로 수개월 동안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안중근 의사의 부친은 프랑스인 빌렘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신부들의 도움으로 양곡 반환 문제가 해결되어 습니다. 그후 안중근 의사의 부친은 1897년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일가족 3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안중근 의사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학교 설립하며 교육계몽운동 전개


의거 직후찍은 의사의 사진.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안중근 의사는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통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습니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해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3월 청계동을 떠나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서우학회에 가입 후, 진남포에 삼흥ㆍ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평양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습니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부인의 금반지와 은반지, 비녀 등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럼에도 조국의 운명은 위태해져 갔습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습니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계속되자 안중근 의사는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이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의병부대를 이끌며 일군과 전투, 박애주의 근거해 포로 전원 석방


안중근 의사의 수감 감방문 사진.

안중근 의사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범윤 의병부대로 알려진 것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 의병부대였습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백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을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습니다.
 
1908년 6월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습니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제2차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제1차 진공작전과 마찬가지로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고 10여명의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는 이들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시켰습니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의사가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사는 의병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사고, 또 포로의 석방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는고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이후 온갖 고초 끝에 안중근 의사는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본거지로 귀환하여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없었고, 그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들도 없었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는 심한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의 기자, 대동학교의 학감, 한인민회의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

 
하얼빈 의거 3일 전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안중근·우덕순·유동하 선생이다.

1909년 9월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습니다. 이때 큰 도움을 준 것이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는데, 사장인 유진율은 자금과 권총 3정을 내주었고,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습니다. 이들의 지원 아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향하였습니다.

이후 유동하, 조도선 등이 일행에 합류 하였고, 만주 철도의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 두 곳에서 거사를 추진하기로 하였습니다. 열차가 정차하는 전략적 요지인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결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으며, 거사 지역 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 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투숙한 역 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버리는 바람에 채가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안중근 의사의 계획 뿐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드디어 하얼빈역에 도착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과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30분경 재무대신의 인도로 역 구내에 늘어서 있는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신중히 주시하던 안중근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 히로부미는 쓰러졌습니다.

여기서 잠깐! 사열이란? '조사하거나 검열하기 위하여 하나씩 쭉 살펴봄'이라는 뜻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대의 훈련 정도, 사기 등을 살펴보았다 라고 해석하시면 됩니다.

이어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오인했을 경우를 대비해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습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고,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사형을 선고 받고, 거사 이유를 밝히는 저술에 심혈을 기울여


순국 5분전에 어머니가 지어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의사

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은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이었습니다. 재판은 일본인들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습니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이토 히로부미 총격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또한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순국 직전에 그는 아우 정근(定根)・공근(恭根)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業)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면 만세를 부를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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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캐스트, 한국독립운동사

원본글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3920&leafId== , http://search.i815.or.kr/Indeman/Indeman.jsp?tid=ma&c1=%EC%9A%B4%EB%8F%99%EA%B3%84%EC%97%B4

 

Posted by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콜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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